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 비 내리는 날은 누군가 찾아와 노크하듯 창문위로 빗방울이 맺힌다. 나도 모르게 한 잔의 커피를 마시고 싶다는 생각에 얼른 물을 끓이고 커피를 탄다. 모락모락 올라오는 수증기. 온 집안 가득 그리움의 향기로 물들인다. 고종황제가 처음으로 마셨다는 커피가 세월을 뛰어넘어 내 손에 들어온다. 창가에 기댄 손위에 피어오르는 커피 향. 지난날의 추억들을 들춰낸다.

 임신 중에도 하루 세 잔의 커피를 마시지 않으면 허전하다던 친구. 주위의 충고에도 아랑곳하지 않더니 은근히 태어날 아이가 걱정된다면서도, 빠지지 않고 커피잔을 들고 있던 친구의 얼굴이 동그라미를 그리며 찾아온다. 아이가 태어날 때 까만 얼굴로 태어날까 봐 두려워하면서도 늘 손에 들린 커피잔을 잊을 수가 없다. 하지만 친구의 아이는 뽀얀 얼굴을 한 아들이었다. 지금까지도 변함없이 커피와 벗을 삼을 친구가 주룩주룩 비가 내릴 때면 유난히 보고파 나 역시 한 잔의 커피로 그리움을 달랜다.

 시집살이 고달플 때마다 마시던 커피가 이제 친구가 되어 버렸다는 손아래 동서. “형님 저는 커피 향을 맡으며 지내는 시간이 짧지만 나를 행복하게 한답니다.”라는 말이 끝나기도 전에 동서만이 낼 수 있는 진한 특유의 커피 향을 낸다. 시댁에서 아무리 바쁜 일을 하다가도 커피가 생각나 일을 할 수가 없다면서 형님! 우리 커피 한잔하고 합시다.” 하고 재촉할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다. 그러다 어머니께서 들어오시면 동서는 얼른 어머니께로 다가가 어머니예 어머니도 커피 한 잔 하실랍니까?” 하고 연신 애교를 피운다. 어머니께서는 아이구 야야, 나는 그 코피인지 뭔지 써서 못 먹는데이, 니거나 맛있거든 많이 먹고 하던 일이나 해지기 전에 얼른얼른 끝내거라.” 하신다. 그럴 때면 미안해서 어쩔 줄 몰라 하면서도, 마시던 그 커피가 왜! 그리도 달콤하던지. 짜릿함마저 들어 한잔 더 하고 싶다는 아쉬움을 꿀꺽 삼켜야 했다. 그런 마음이 어디 동서만이 들었을까. 주부라면 바쁜 일상을 뒤로 할 수 있는 유일한 탈출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에, 우린 커피를 더 즐겨 마시는지도 모른다.

 동서의 이마에도 10년이란 결혼생활의 흔적이 그려져 있지만 커피향처럼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형님 할 때는 더없이 흐뭇해진다. 그렇게 세월이 흐른 어느 날 아버님께서 우리들의 마음을 알아차리기라도 하듯 설거지가 어느 정도 끝날 무렵 커피를 신청하신다. 그럴 때마다 마지못해 인상을 찌그리시며 한 두 모금 드시던 어머니. 손님이 오실 때면 술상 아니면 과일을 내놓는 것이 전부였던 시댁이었는데, 요즈음은 야야, 오늘은 코핀지 하는 것 그것 한잔 가오너라.” 할 때가 종종 있다. 그 덕에 남은 물로 한 잔의 커피를 나누며 조금 전의 힘겨움을 씻어낼 수 있어 좋다.

 기호 식품으로 우리 문화에 깊숙이 파고든 커피. 그윽한 향기는 코를 아리게 하고 마음마저 넉넉하게 해준다. 지난날 연인과의 사랑은 한 잔의 커피를 나누면서 이루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. 피어오르는 커피 향 사이로 상대의 마음은 열리고 쉬이 접근하기 어렵던 상대도 커피나 한자 합시다.”로 시작된 커플이 어디 한 둘이라야지. 누구나 가슴에 묻어 둔 소중한 추억이 있듯이 내게도 아련하게 피어오르는 커피 향 같은 그런 추억 하나 존재한다.

 코스모스 피던 어느 날 어디선가 날아오던 커피 향에 이끌려 만났던 사람. 코스모스 꽃만 보아도 눈물이 난다던 그 사람. 정갈한 차림에 까만 양복을 즐겨 입었고, 클래식 음악을 사랑하였던 사람. 언제까지나 함께 할 것 같았지만, 현실은 우릴 그냥 두지 않았기에······. 그 사람은 없어도 여전히 나와 함께 하는 한 잔의 커피. 쓰라린 가슴을 달래 주기에 충분하다. 해마다 코스모스 꽃은 피고 우리를 부르는데, 함께 할 수 없는 시간들. 그리움이 되어 흐르던 날도 나는 여지없이 커피잔을 들고서 아름다웠던 지난날의 추억에 기대곤 한다. 가을의 문턱으로 들어서면서 제일 먼저 피는 코스모스 꽃을 보면 덩달아 눈물이 날 것 같아 블랙으로 마시던 커피 한 잔. 허전한 빈자리를 채워주기에 더없이 좋아하는지도 모른다.

 80년대 그리도 많이 찾던 다방. 특별히 갈 곳이 없을 때, 마음의 위로가 필요할 때, 친구와의 약속이 있을 때, 한 잔의 커  피를 시켜 놓고 좋아하는 곡목과 D.J 아저씨께 한 말씀 올리고 시간을 보내곤 하였을 때도 어김없는 친구가 되었다. 여기저기서 피어오르던 커피 향에 취해 허전했던 마음 언저리는 어느새 넉넉해 오고 돌아가는 발걸음은 가볍기까지 했다. 그렇게 알게 된 커피는 이제 헤어질 수 없는 친구로 자리매김한다.

거리를 지나다가도 커피 향이 은은히 배어 있는 커피가 있는 풍경이 눈에 띌 때도 나도 모르게 발길이 옮겨진다. 나만의 사색을 위하여 다가오는 커피 향. 언제까지나 문학소녀이고 싶은 내 마음을 알아주기에 난 커피와 함께 한다. 한 잔의 커피로 수많은 만남을 만들고 추억을 엮어간다.

 간혹 몸에 좋지 않으니 마시지 않는 것이 좋다고들 한다. 하지만 우리 삶처럼 적절하게 넘치지 않고 적당하게 즐길 줄 안다면 커피가 우리에게 주는 즐거움을 어디에다 비할 수 있으랴. 한줄기 소나기라도 내리는 날은 그리움이 뚝뚝 떨어지는 것을 주워 담기에도 그만이다. 한 잔의 커피로 가쁜 세월을 쉬어가게 하고, 여유를 즐길 줄 안다면 이보다 더 좋을 수 있을까.

 나는 커피 마시기를 좋아한다. 오늘처럼 비가 내리는 날이면 더욱더 그렇다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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